원산지

카테고리 없음 2021. 1. 8. 23:30

인간으로써 생산의 목적이 재화가 아니라면,
애정외엔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 생산은 심지어 재화의 소비이다.

나의 생산품 중 책임감이 없을건 아무것도 없이 살아왔다.

어린시절 작고 힘없던 딱지도 내손을 떠날때의 아픔이 기억과 마음에 남아 있다.

애정으로 생산한 후 만듬을 끝내지도 않는다.
계속 좋아지게 하고 소중하게 한다.

공간, 공동체, 감정, 기억, 지식.... 애정으로의 생산은 물건으로 끝나지도 않고 심지어 생명까지 포함한다.

사실 이 생산은 삶의 원인 일지도 모른다. 이 생산품들이야 말로 나의 유/무형의 정의 일지도 모른다.

애정으로의 생산을 혼자 하지 않을 때도 있다. 혼자 생산을 하기 어려운 생산품을 위해 이를 원하는 복수 다수의 개인이 이해 관계를 맞춰 왔다. 생산이 목적인 인간은 이를 위해 인간은 사회를 만들었다.

사회는 가족, 부족, 도시, 국가 등으로 과학기술의 편의 제공과 동시에 범위를 확장 시켰다.

비극은 애정의 생산이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재화를 불러 오는것 으로부터 시작 된다.

사회는 애정으로써 생산의 고품질을 위해 고안 되었으며, 고품질의 생산품들은 재화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목적이 애정인지 재화인지 애매한 상황이기만 해도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선택 할테지만, 사회에서 재화의 힘은 막강했다.

이 엄청난 아이러니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는 모습을 기형적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생산품들은 재화의 창출이 목적이 되어가고, 삶의 기본 조건들이 재화로 해결되기 시작한다. 살기위해 재화가 필요하게 되고 생산을 해야 재화를 취할 수 있다. 모두 더 많은 재화를 원하고 그러기 위해 더 좋은 생산품 들이 만들어 지고, 그를 위해 더 많은 재화가 필요해 진다.

개인의 시점에선 너무나도 높은 품질의 생산품이 당연한 삶의 조건이 되었다. 애정생산품은 더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다. 모두 생산품을 만들고 있지만 소비하는 생산품에서 자신의 생산력이 포함 되었는지도 더이상 인지 할 수 없다.

어렸을때 친구의 팔 휘두름에 사라졌던 온전한 나의 생산품을 위한 나의 수고와 삶을위한 생산품을 위한 나의 수고에 가치를 논하고 싶다.

나의 생산품은 나의 정의 일지도 모른다. 내가 재화를 위해 하는 생산활동의 생산품은 더이상 무엇의 얼마만큼인지도 인지 할 수 없다.

결국 나의 생산품은 재화가 되고 재화가 나의 정의가 된다.








Posted by 황인성